창세기의 장르 (2)


 (이전 글)

그래서 결국, 우리는 대부분의 것을 '증언'을 통해 믿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직접 보거나 검증한 것은 사실 매우 적다.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매개로 우리에게 도달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도, 먼 나라의 풍경도, 미시 세계의 입자도 우리는 직접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빛의 속도조차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안내와 정밀한 장비, 그리고 그 장비를 만든 사람들의 신뢰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결국 관측한 사람들의 증언과 그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명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언을 통해 안다'는 것은 신앙에만 해당하는 특별한 인식 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이다.


이 자리에서 성경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증언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시고, 넷째 날에야 비로소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다고 증언한다. 둘째 날 물과 물을 나누시고 그 사이의 공간을 '궁창'이라 부르셨다고 말한다. 태양이 아직 있지 않았던 셋째 날에도 식물이 있게 하셨다고 증언한다. 우리가 그 메커니즘을 다 이해할 수 없을 뿐, 성경은 흔들림 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곧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빛의 속도가 왜 그러한지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창조의 메커니즘을 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증언 자체가 사실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창세기는 도대체 어떤 장르의 책인가. 성경에는 분명 다양한 장르가 있다. 시가서가 있고, 예언서가 있고, 역사서가 있고, 율법서가 있다. 시편을 펼치면 그 책은 스스로의 장르가 시라고 스스로를 들어낸다. 운율과 평행법, 비유와 호소가 표면에 드러나 있어 우리가 그것을 시로 읽도록 본문 자체가 안내한다. 예언서도 마찬가지다. 환상과 선포의 어법, 시대와 청중을 향한 부르짖음이 그것이 예언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책은 자신의 장르를 본문을 통해 보여 준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어떤가. 창세기 본문 자체를 두고 보면 — 적어도 나에게는 — 그것이 역사서로 읽힌다. 시처럼 운율을 따라 흐르지 않고, 신화처럼 신들의 다툼이나 우주적 혼인의 드라마를 펼치지 않는다. 우화처럼 도덕적 교훈을 위해 의인화된 인물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창세기는 차분한 어조로 사건의 순서를 따라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진술한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족보가 곧이어 이어지고, 그 족보는 다시 구체적인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모든 서술의 결은 '있었던 일에 대한 증언'의 결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스스로를 은유나 신화나 문학적 우화로 제시하지 않고, 사실에 대한 증언으로, 즉 역사서로서 말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읽을 때 비로소 본문이 지닌 무게가 본래의 무게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라는 말에 처음 거북함을 느꼈던 이유가 이제 조금 더 분명해진다. 그것은 성경이 과학적 진술과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종종 성경의 증언 자체를 사실의 자리에서 옮겨놓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과학책은 아닐지언정, 분명히 증언서다. 그리고 그 증언은 우리가 보지 못한 시간, 도달할 수 없는 사건, 인식의 한계 너머의 실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증언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범주 안으로 끌어내려 다듬을 것인가.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결국 이 갈림길 앞에 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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