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과 2장의 모순 (2)
그런 의미에서 또 흥미롭게 살펴볼 곳이 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향할 때, 그의 나이와 그의 아버지 데라의 나이를 함께 놓고 계산해 보면 표면적으로 모순처럼 보이는 지점이 드러난다. 창세기 11장 26절은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고 말한다. 창세기 12장 4절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일흔다섯 살이었다고 분명히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때 데라의 나이는 70 + 75, 즉 145세가 된다. 그런데 창세기 11장 32절은 데라가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아브람이 떠난 뒤에도 데라는 하란에 60년을 더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사도행전 7장 4절에서 스데반이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떠나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라고 증언한 말씀이 겹쳐지면, 이 세 본문 사이에 풀리지 않는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본문은 우리에게 다른 결을 내어 보여 준다. 창세기 11장 31절을 보면, 본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나선 사람은 아브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였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이며 자기 손자인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본문이 분명히 말하듯, 데라도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부르심에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멈춘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첫 부르심을 데라와 함께 받았던 아브람이, 하란에 멈추어 선 아버지를 그 자리에 둔 채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다.
이런 결을 따라가다 보면, 사도행전 7장 4절에서 스데반이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떠나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라고 말한 진술도 다른 각도에서 읽힌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데라는 아브람이 떠난 뒤에도 하란에서 60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스데반의 진술이 굳이 그 60년을 모르고 한 말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청중 앞에서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빠른 호흡으로 짚어 가던 중이었고,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향한 그 결정적 발걸음을 설명하기 위해 데라의 자리를 한 마디로 정리한 것일 수 있다. 데라는 부르심을 함께 받았으나 하란에서 머물렀고, 그 자리에서 그의 여정은 사실상 끝났다. 가나안을 향한 길에서 그는 더 이상 동행자가 아니었다. 스데반의 "죽으매"라는 표현은 어쩌면 그의 육신의 죽음만을 가리키기보다, 부르심을 따라가는 자의 자리에서 그가 이미 멈추어 섰다는 사실을, 신약의 저자가 한 단어로 압축해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가나안을 향해 함께 떠났던 한 사람이 하란에서 그 길을 그치고 만 것, 그것이 그 부르심에 대해서는 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읽으면 충돌처럼 보이던 자리는 다시 한 번 결을 풀어낸다. 산술적인 햇수를 두고 본문들이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신약의 저자가 구약의 긴 이야기를 자신의 신학적 시선으로 압축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 해석이 유일한 답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자리에서도 본문은, 우리가 충돌이라 부른 것을 충돌로 두지 않고 그 위에 또 하나의 의미를 얹어 우리에게 돌려준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름의 나열, 햇수의 셈, 죽음이라는 단어 —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익숙한 관습 그대로 본문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은, 본문이 우리의 관습보다 더 큰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력을 보태보고, 해당 본문을 자세히 보면 데라가 아브라함을 130세에 낳았다고 추론해볼 수도 있다. 물론 억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사건에 대한 성경의 단면적인 설명만으로는 우리는 전체를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섣불리 그것이 모순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의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주장을 들을 때도 많이 있다. 그것은 어느 한쪽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 주장하고 싶어하는 바와 보는 각도,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같은 자리에 서게 된다. 본문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읽힐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빠르게 "이것은 오류다"라고 결론짓는 길이 있고, 본문이 어떤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더 천천히 들여다보는 길이 있다. 첫째 길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 순서, 익숙한 서술 관습, 익숙한 인과의 틀을 그대로 본문에 들이대는 길이다. 둘째 길은, 본문이 우리에게 들어맞지 않을 때 어쩌면 우리의 틀이 본문에 들어맞지 않을 가능성을 먼저 의심하는 길이다. 본문은 본문대로의 결과 호흡이 있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처음에 모순으로 보이던 것이 사실은 다른 종류의 서술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는 분명, 처음 읽을 때 어긋나 보이는 자리들이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순서가 그러하고, 데라와 아브람의 나이 계산이 그러하며, 복음서 사이에 사건의 배열이 다소 다르게 보이는 자리도 있다. 그러나 이 어긋남들은 대개 본문이 사건을 시간 순으로만 줄 세우지 않고, 신학적 초점과 서술의 의도에 따라 빛의 각도를 바꾸어 보여 주기 때문에 생긴다. 본문의 결을 따라 다시 읽으면, 그 자리들은 오류의 흔적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는 표지가 된다. 우리가 본문을 우리의 틀에 맞추어 재단할 때 그것은 모순이지만, 본문의 결에 우리가 맞추어 들어갈 때 그것은 깊이가 된다.
그러므로 모순처럼 보이는 자리 앞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본문이 우리에게 어떻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한 번 더 듣는 일이다. 성경이 자기 자신을 서술하는 방식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그것을 오류로 처리하지 않고 증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일 때, 본문은 자신의 무게를 본래의 무게대로 우리에게 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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