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뱀, 그리고 간교하다는 말 (2)

(이전글)   이 맥락으로 들짐승의 모습 안에 다른 존재가 들어와 있었다고 읽으면, 짐승의 능력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그 자리에서 일어난 까닭이 풀린다. 창세기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겉모습과 그 안의 존재가 다른 자리를 그대로 적었고, 그 두 층이 어긋나 보이는 부분에서 단서를 남겨 두었을 뿐이다. 그 단서를 신약이 받아 풀어 준다. 그리고 짐승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나오는 일이 성경에서 한 번뿐이지 않다. 발람의 나귀가 떠오른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라는 한 마디다. 짐승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나오는 일을 그 짐승의 본능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가 그 입을 연다고 분명히 짚는다. 창세기 3장에서는 발람의 나귀와는 다른 존재가 뱀의 입을 열었을뿐이다. 욥기 1장, 2장도 한 호흡을 보탠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사람의 일에 끼어든다. 본문은 이 존재를 거창하게 소개하지 않고, 사탄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자연스럽게 적어 둔다. 우리의 일상 감각으로 보이지 않는 차원이 분명히 있고, 그 차원이 사람의 자리에 손을 대는 일이 성경에서 낯선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 물음으로 돌아온다. 뱀이 어떻게 말을 했는가? 3장은 그 작동 원리를 풀어 주지 않는다. 짐승의 입에서 어떻게 사람의 말이 났는지, 그 안에 어떻게 다른 존재가 있었는지, 본문 어디에도 그 설명은 없다. 본문은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 적어 놓았다. 그런데 작동 원리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는가? 그건 또 다른 자리다. 작동 원리에 대한 이해와 그 일이 사실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차원에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작동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때로는 우리가 너무 쉽게 닫아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본문 앞에서 우리는 두 길을 두고 선다. 하나의 길은 우리의 자연 법칙적 사고를 잣대 삼아 본문의 진술을 비유나 신화로 옮기는 길이다. 그 길에서는 말하는 뱀이 ...

말하는 뱀, 그리고 간교하다는 말

 창세기 3장을 펼치면 곧장 두 가지가 나를 멈춰 세운다. 뱀이 말을 한다는 것, 그리고 본문은 그 뱀을 "간교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동화도 아니고, 현실에서 짐승이 말을 해서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또 간교하다는 말은 어떠한가? 본문은 이 자리에서 친절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다만 본문에서 단서들을 살펴볼 수는 있다. 먼저 창세기 3장이 뱀을 어떻게 소개하는지부터 살펴본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창 3:1). 만약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동산에 들어오는 장면을 그렸다면, 차라리 덜 당황스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창세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라고 짧게 설명만한다. 이게 내가 가장 먼저 살펴보는 단서다. 뱀은 다른 세계에서 동산으로 잠입한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의 하나로 거기 있었다. 그런데 뱀이 말을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이 아담에게 어떤 명령을 하셨는지 뱀이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뱀은 그 명령을 살짝 비튼다.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셨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 2:16-17). 허락이 먼저 나오고, 금지가 나중이다. 그런데 뱀의 입에서 이 말이 다시 나올 때는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로 바뀐다. 허락은 잘려 나가고, 금지만 남았다. 한 단어, 한 어순의 작은 비틀림이지만, 이 비틀림 때문에 하와에게 하나님이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지는 않았을까? 너그러우신 하나님 대신, 인색하고 의심을 살 만한 하나님 말이다. 상당히 고수의 전략처럼 보인다. 이런 전략을 뱀이 자신의 능력으로 행...

창세기 1장과 2장의 모순 (2)

(이전글)   그런 의미에서 또 흥미롭게 살펴볼 곳이 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향할 때, 그의 나이와 그의 아버지 데라의 나이를 함께 놓고 계산해 보면 표면적으로 모순처럼 보이는 지점이 드러난다. 창세기 11장 26절은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고 말한다. 창세기 12장 4절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일흔다섯 살이었다고 분명히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때 데라의 나이는 70 + 75, 즉 145세가 된다. 그런데 창세기 11장 32절은 데라가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아브람이 떠난 뒤에도 데라는 하란에 60년을 더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사도행전 7장 4절에서 스데반이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떠나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라고 증언한 말씀이 겹쳐지면, 이 세 본문 사이에 풀리지 않는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본문은 우리에게 다른 결을 내어 보여 준다. 창세기 11장 31절을 보면, 본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나선 사람은 아브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였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이며 자기 손자인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본문이 분명히 말하듯, 데라도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부르심에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멈춘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첫 부르심을 데라와 함께 받았던 아브람이, 하란에 멈추어 선 아버지를 그 자리에 둔 채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다. 이런 결을 따라가다 보면, 사도행전 7장 4절에...

창세기 1장과 2장의 모순

 창세기 2장 5절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들은 어쩌면 여기서 멈칫할 수도 있겠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는 구절이, 바로 앞 1장에서 이미 셋째 날에 식물을 내시고 여섯째 날에 사람을 지으셨다는 서술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장에서는 식물이 사람보다 먼저인데, 2장에서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식물이 있게 될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2장 19절에서는 하나님이 들짐승과 새들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데려와 이름을 붙이게 하시는데, 이 또한 1장에서 짐승이 사람보다 먼저 창조되었다는 순서와 충돌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이것이 모순으로 읽히지 않는다. 성경의 여러 부분을 살펴보면, 본문이 무언가를 서술하는 방식 자체가 우리가 익숙해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종종 먼저 전체를 한 호흡으로 펼쳐 보인 뒤, 다시 그 안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그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한다. 비유하자면, 카메라가 한 번 멀리 빠져 전체 풍경을 보여 주고 나서, 다시 그 안의 한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창세기 1장이 창조 전체의 6일을 큰 그림으로 펼쳐 보였다면, 2장은 그 큰 그림 가운데 여섯째 날의 한 장면, 즉 사람의 창조와 그 사람이 놓인 자리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한 번 천천히 묘사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여기서 본문이 스스로 단서를 내어 보여 준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2장 5절은 그저 '초목이 없었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그 앞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라는 조건을 분명히 달고 있다. 본문이 말하는 '없음'은 식물 일반의 부재가 아니라, 비와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그 종류의 초목...

창세기의 장르 (2)

이미지
  (이전 글) 그래서 결국, 우리는 대부분의 것을 '증언'을 통해 믿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직접 보거나 검증한 것은 사실 매우 적다.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매개로 우리에게 도달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도, 먼 나라의 풍경도, 미시 세계의 입자도 우리는 직접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빛의 속도조차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안내와 정밀한 장비, 그리고 그 장비를 만든 사람들의 신뢰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결국 관측한 사람들의 증언과 그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명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언을 통해 안다'는 것은 신앙에만 해당하는 특별한 인식 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이다. 이 자리에서 성경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증언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시고, 넷째 날에야 비로소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다고 증언한다. 둘째 날 물과 물을 나누시고 그 사이의 공간을 '궁창'이라 부르셨다고 말한다. 태양이 아직 있지 않았던 셋째 날에도 식물이 있게 하셨다고 증언한다. 우리가 그 메커니즘을 다 이해할 수 없을 뿐, 성경은 흔들림 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곧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빛의 속도가 왜 그러한지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창조의 메커니즘을 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증언 자체가 사실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창세기는 도대체 어떤 장르의 책인가. 성경에는 분명 다양한 장르가 있다. 시가서가 있고, 예언서가 있고, 역사서가 있고, 율법서가 있다. 시편을 펼치면 그 책은 스스로의 장르가 시라고 스스로를 들어낸다. 운율과 평행법, 비유와 호소가 표면에 드러나 있어 우리가 그것을 시로 읽도록 본문 자체가 안내한다. 예언서도 마찬가지다. 환상과 ...

창세기의 장르

이미지
요즘 신앙의 자리에서, 또는 기독교 안팎의 여러 글에서 흔히 듣게 되는 말이 하나 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 말이 꽤 균형 잡힌 표현처럼 들리기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어 무리한 결론을 끌어내는 사람들에 대한 점잖은 제동(制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또 들으며 살피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거북함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왜 굳이 성경을 과학책에 빗대어 이야기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말을 통해 사람들이 결국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신자의 입장에서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정면으로 말하기는 부담스러우니,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라는 보다 부드럽고 학술적으로 들리는 표현을 빌려 같은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표면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창세기의 서술을 사실의 영역에서 빼내어 신화나 상징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효과를 가지는 것은 아닌가. 이 의문을 품고서 나는 다시 창세기 1장을 펼쳐 본문 자체를 차분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본문을 한 절 한 절 따라가다 보면, 사실 여러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빛은 분명 첫째 날 창조되었는데, 정작 빛의 근원인 광명체(해와 달과 별)는 왜 넷째 날이 되어서야 따로 창조되었는가. 또 왜 달을 광명체라고 했을까? 빛과 태양을 같은 날에 함께 만드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우주의 질서를 생각하면 보통 태양이 먼저고 그 주위를 도는 행성으로서 땅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창세기는 적어도 그 서술의 순서상 땅을 먼저 두고 태양을 나중에 두고 있다. 더 나아가 지구 생명의 에너지원이 되는 태양 없이, 어떻게 셋째 날에 채소와 나무가 먼저 자라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1장 2절을 가만히 보면, 그 시점에 이미 지구는 어떤 형태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