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과 2장의 모순

 창세기 2장 5절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들은 어쩌면 여기서 멈칫할 수도 있겠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는 구절이, 바로 앞 1장에서 이미 셋째 날에 식물을 내시고 여섯째 날에 사람을 지으셨다는 서술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장에서는 식물이 사람보다 먼저인데, 2장에서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식물이 있게 될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2장 19절에서는 하나님이 들짐승과 새들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데려와 이름을 붙이게 하시는데, 이 또한 1장에서 짐승이 사람보다 먼저 창조되었다는 순서와 충돌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이것이 모순으로 읽히지 않는다. 성경의 여러 부분을 살펴보면, 본문이 무언가를 서술하는 방식 자체가 우리가 익숙해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종종 먼저 전체를 한 호흡으로 펼쳐 보인 뒤, 다시 그 안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그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한다. 비유하자면, 카메라가 한 번 멀리 빠져 전체 풍경을 보여 주고 나서, 다시 그 안의 한 인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창세기 1장이 창조 전체의 6일을 큰 그림으로 펼쳐 보였다면, 2장은 그 큰 그림 가운데 여섯째 날의 한 장면, 즉 사람의 창조와 그 사람이 놓인 자리에 초점을 맞추어 다시 한 번 천천히 묘사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여기서 본문이 스스로 단서를 내어 보여 준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2장 5절은 그저 '초목이 없었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그 앞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라는 조건을 분명히 달고 있다. 본문이 말하는 '없음'은 식물 일반의 부재가 아니라, 비와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그 종류의 초목과 채소가 아직 자리잡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1장 셋째 날에 땅이 스스로 내어 자라게 한 풀과 나무와는 결이 다른 식물 — 농경의 식물, 사람과 더불어 비로소 자라기 시작하는 식물 — 이 아직 없었다는 진술이다. 그러므로 2장 5절은 1장의 창조를 뒤엎는 말이 아니라, 1장 다음의 한 자리, 곧 사람이 들어서기 직전의 그 자리를 보여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2장 19절에서 짐승을 사람에게 이끌어 오시는 장면은 짐승의 창조 시점을 다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어진 짐승들을 사람 앞에 데려오시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장면이다. 히브리어 동사의 시제는 영어나 한국어처럼 시간 순서를 엄밀히 못박지 않기에, 이런 장면 전환을 본래의 결대로 읽으려면 단선적 연대기보다 서술의 결을 먼저 살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1장과 2장이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하기에 앞서서,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말해보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모두 그 자리에 없었고, 창조의 때에 대해 서술하는 짧은 글로 판단을 해보는 것이니, 사실 이것도 저것도 다 틀린 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원점을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1장과 2장이 서로 모순이라고 하는 것 보다 위의 주장이 더 그 원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먼저 전체, 다음에 부분'의 서술 방식은 창세기 안에서도 거듭 나타난다. 창세기 1장이 창조 전체를 펼친 뒤 2장이 사람을 클로즈업하는 것처럼,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나온 민족들의 계보를 한 번에 펼쳐 보인 뒤, 11장에서는 그 가운데 셈의 후손을 따라 다시 천천히 내려와 아브라함에 이른다.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후손을 한꺼번에 정리해 보여 주고, 37장부터는 다시 야곱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큰 틀을 먼저 세우고 그 안에서 한 가닥을 따라 다시 들어가는 이 흐름은, 성경이 사건을 단순히 시간 순으로 나열하기보다 어떤 특별한 초점에 따라 빛을 비추는 방식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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