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앙의 자리에서, 또는 기독교 안팎의 여러 글에서 흔히 듣게 되는 말이 하나 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이 말이 꽤 균형 잡힌 표현처럼 들리기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어 무리한 결론을 끌어내는 사람들에 대한 점잖은 제동(制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또 들으며 살피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거북함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왜 굳이 성경을 과학책에 빗대어 이야기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말을 통해 사람들이 결국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신자의 입장에서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정면으로 말하기는 부담스러우니,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라는 보다 부드럽고 학술적으로 들리는 표현을 빌려 같은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표면적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창세기의 서술을 사실의 영역에서 빼내어 신화나 상징의 영역으로 옮겨놓는 효과를 가지는 것은 아닌가. 이 의문을 품고서 나는 다시 창세기 1장을 펼쳐 본문 자체를 차분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본문을 한 절 한 절 따라가다 보면, 사실 여러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빛은 분명 첫째 날 창조되었는데, 정작 빛의 근원인 광명체(해와 달과 별)는 왜 넷째 날이 되어서야 따로 창조되었는가. 또 왜 달을 광명체라고 했을까? 빛과 태양을 같은 날에 함께 만드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우주의 질서를 생각하면 보통 태양이 먼저고 그 주위를 도는 행성으로서 땅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창세기는 적어도 그 서술의 순서상 땅을 먼저 두고 태양을 나중에 두고 있다. 더 나아가 지구 생명의 에너지원이 되는 태양 없이, 어떻게 셋째 날에 채소와 나무가 먼저 자라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1장 2절을 가만히 보면, 그 시점에 이미 지구는 어떤 형태로든...
(이전 글) 그래서 결국, 우리는 대부분의 것을 '증언'을 통해 믿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직접 보거나 검증한 것은 사실 매우 적다.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매개로 우리에게 도달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도, 먼 나라의 풍경도, 미시 세계의 입자도 우리는 직접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빛의 속도조차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접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의 안내와 정밀한 장비, 그리고 그 장비를 만든 사람들의 신뢰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결국 관측한 사람들의 증언과 그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명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언을 통해 안다'는 것은 신앙에만 해당하는 특별한 인식 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이다. 이 자리에서 성경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증언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시고, 넷째 날에야 비로소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다고 증언한다. 둘째 날 물과 물을 나누시고 그 사이의 공간을 '궁창'이라 부르셨다고 말한다. 태양이 아직 있지 않았던 셋째 날에도 식물이 있게 하셨다고 증언한다. 우리가 그 메커니즘을 다 이해할 수 없을 뿐, 성경은 흔들림 없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곧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빛의 속도가 왜 그러한지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창조의 메커니즘을 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증언 자체가 사실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창세기는 도대체 어떤 장르의 책인가. 성경에는 분명 다양한 장르가 있다. 시가서가 있고, 예언서가 있고, 역사서가 있고, 율법서가 있다. 시편을 펼치면 그 책은 스스로의 장르가 시라고 스스로를 들어낸다. 운율과 평행법, 비유와 호소가 표면에 드러나 있어 우리가 그것을 시로 읽도록 본문 자체가 안내한다. 예언서도 마찬가지다. 환상과 ...
(이전글) 그런 의미에서 또 흥미롭게 살펴볼 곳이 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향할 때, 그의 나이와 그의 아버지 데라의 나이를 함께 놓고 계산해 보면 표면적으로 모순처럼 보이는 지점이 드러난다. 창세기 11장 26절은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고 말한다. 창세기 12장 4절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일흔다섯 살이었다고 분명히 기록한다. 그렇다면 그때 데라의 나이는 70 + 75, 즉 145세가 된다. 그런데 창세기 11장 32절은 데라가 205세에 하란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산술적으로만 따지면, 아브람이 떠난 뒤에도 데라는 하란에 60년을 더 살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사도행전 7장 4절에서 스데반이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떠나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라고 증언한 말씀이 겹쳐지면, 이 세 본문 사이에 풀리지 않는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본문은 우리에게 다른 결을 내어 보여 준다. 창세기 11장 31절을 보면, 본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나선 사람은 아브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였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이며 자기 손자인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본문이 분명히 말하듯, 데라도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부르심에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까지 가지 못하고 하란에서 멈춘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첫 부르심을 데라와 함께 받았던 아브람이, 하란에 멈추어 선 아버지를 그 자리에 둔 채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다. 이런 결을 따라가다 보면, 사도행전 7장 4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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